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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다드지구 5.30 사건 집회.jpg
1987년 7월 11일 하다드지구 중앙로에서 열린 진상규명 요구 집회. 이날 집회는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 루이나군 하다드지구 성폭행 사건
  • 5.30 사건 · 하다드 사건 (유고랜드 내 통칭)
  • 로스탐 사건 (루이나 내 통칭)
루이나군 하다드지구 성폭행 사건
발생 일시
1987년 5월 30일 23시경
발생 장소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부 하다드지구 외곽
유형
성폭력 범죄, 주둔군 범죄
발생 주체
루이나 공군 제4전술비행단 소속 병사 3명
범인
올리비에 T. 뒤메닐
드니 M. 파주
파스칼 J. 르그랑
피해자
1명
재판
루이나 공군 군사법원 (비공개)
재판 결과
징역 4년 1명, 징역 2년 1명, 무죄 1명
본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복무 중인 점, 초범인 점, 피해 회복을 위한 성의를 표한 점을 참작한다.

1987년 11월 20일, 루이나 공군 제4전술비행단 군사법원 판결 요지
우리는 그날 밤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은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이다. 누가 무엇을 결정했는지,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그 결정을 적은 종이가 어디에 있는지.

1993년 10월 19일, 유고랜드 민의원 주둔군범죄특별조사위원회 1차 보고서 서문

1. 개요2. 배경
2.1. 독립 직후의 유고랜드2.2. 모르방 기지와 하다드지구2.3. 지위협정 제22조
3. 사건4. 수사5. 재판권 포기6. 군사법원 재판7. 반응
7.1. 유고랜드7.2. 루이나
8. 그 후
8.1. 세 사람8.2. 피해자8.3. 협정 개정 요구의 좌절8.4. 유고랜드 측 태도의 변화8.5. 재조명
9. 여담10.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1987년 5월 30일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부 하다드지구에서 루이나 공군 병사 3명이 현지인 여성 1명을 납치해 성폭행한 사건. 유고랜드가 주둔군지위협정에 따른 재판권을 포기하고 루이나 군사법원이 심리한 마지막 중대범죄 사건이며, 9년 뒤 루이나군 진양통 부부 살인사건에서 유고랜드가 재판권 포기 요청을 거부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유고랜드 독립 이후 처음으로 전국 규모의 항의 시위를 불러온 사건이기도 하다.

2. 배경 [편집]

2.1. 독립 직후의 유고랜드 [편집]

유고랜드는 1958년부터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이었다가 1984년 9월 8일 독립했다. 사건이 일어난 1987년은 독립 3년차였다.

독립 이후 들어선 정부는 형식상 민주공화제를 택했으나 실질은 권위주의에 가까웠다. 집회·시위는 사전 허가제였고 신문 발행은 등록제로 통제되었다. 경찰과 검찰 조직은 괴뢰국 시기의 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상태에서 정비가 진행 중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아직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1]

사건 당시 유고랜드 정부는 루이나와 두 건의 현안을 안고 있었다. 하나는 독립 이후 처음 추진하던 대외 차관 협의였고, 다른 하나는 방공망 도입 사업의 조건 협의였다. 두 건 모두 1987년 하반기에 타결 예정이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부가 보인 소극적 태도의 배경으로 이후 가장 많이 지목된 것이 이 두 현안이다.

2.2. 모르방 기지와 하다드지구 [편집]

루이나군은 1985년 4월 체결된 상호방위조약과 주둔군지위협정에 따라 같은 해 여름부터 유고랜드에 전개했다. 주둔 2년째이던 1987년 당시 병력은 약 2만 6,000명이었다.

모르방 기지는 1985년 개설된 루이나 공군 기지로, 사건 당시 제4전술비행단과 지원부대 약 3,9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랜드해협 남측 항로와 유고랜드 남부 접근로의 감시가 주 임무였다.

하다드지구는 나크시에 로스탐부 소속으로, 사막 가장자리의 관개 농업과 소규모 가공업으로 유지되던 인구 6만 8,000여 명의 지구였다. 유고랜드 남부는 아랍어권이며, 하다드지구 주민도 대부분 아랍계였다. 기지는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져 있었고, 두 곳을 잇는 지방도 주변에 병사 상대 업소 130여 개가 늘어서 있었다.

하다드지구는 나자프정 진양지구만큼 기지에 종속된 지역은 아니었다. 이 점이 사건 이후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다. 기지촌 상권이 지역 경제를 좌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항의에 나서는 데 따르는 부담이 작았고, 사건 직후부터 시위가 지속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다.

2.3. 지위협정 제22조 [편집]

1985년 체결된 주둔군지위협정 제22조는 공무집행 중이 아닌 범죄에 대해 유고랜드에 1차 재판권을 부여하되, 루이나의 요청이 있으면 유고랜드가 재판권 포기를 '호의적으로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제22조 제5항은 피의자의 신병을 재판 확정 시까지 루이나 측이 구금하도록 했다.

협정 발효부터 1987년 5월까지 루이나가 제기한 재판권 포기 요청은 148건이었고, 유고랜드가 이를 거부한 사례는 없었다.

3. 사건 [편집]

1987년 5월 30일 토요일, 모르방 기지 소속 올리비에 T. 뒤메닐 상병, 드니 M. 파주 상병, 파스칼 J. 르그랑 일병이 외출해 기지 앞 업소에서 술을 마셨다. 세 사람은 이날 기지 앞 대여점에서 승용차 1대를 빌린 상태였다.

23시경 세 사람은 하다드지구 외곽 지방도에서 귀가하던 여성을 차량에 강제로 태워 인근 관개수로변으로 이동한 뒤 성폭행했다. 피해자는 당시 24세였고, 하다드지구의 직물 가공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23시 40분경 현장을 떠났으며, 피해자는 인근 민가까지 이동해 도움을 요청했다.

피해자는 5월 31일 새벽 나크시에 로스탐부 의료원에 이송되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전치 6주의 상해 진단이 내려졌다.

피해자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유고랜드 언론은 이후 보도에서 가명 '라일라 H.'를 사용했고, 이 표기가 현재까지 관례로 남아 있다.

4. 수사 [편집]

신고를 접수한 나크시에 로스탐부 경찰청은 피해자 진술에서 차량 번호 일부와 군복 표식에 관한 내용을 확보했다. 6월 3일 기지 앞 차량 대여점의 계약서 대조를 통해 세 사람이 특정되었다.

같은 날 경찰청은 모르방 기지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루이나 공군 헌병대는 지위협정 제22조 제5항을 들어 인도를 거부했고, 대신 영내 조사에 유고랜드 경찰 2명의 입회를 허용했다. 6월 5일과 6월 9일 두 차례 입회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조사는 모두 영내에서 루이나 측 주관으로 진행되었고 유고랜드 경찰은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현장에서 채취된 증거물은 유고랜드 경찰이 확보했다. 그러나 차량은 사건 다음 날 대여점에 반납된 뒤 청소된 상태였고, 세 사람의 의류는 영내 세탁을 거친 뒤에 제출되었다. 이후 논쟁의 상당 부분이 이 지점에 집중되었다. 1993년 조사위원회는 의류가 세탁된 경위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5. 재판권 포기 [편집]

6월 11일 루이나 측은 지위협정 제22조 제3항에 따라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다. 요청서는 세 사람이 복무 중이며 루이나 군사법원이 충분한 처벌을 할 수 있다고 적었다.

6월 18일 유고랜드 법무부는 재판권 포기를 통보했다. 발표는 금요일 저녁에 나왔고, 분량은 다섯 문장이었다. 포기 사유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 결정의 경위는 사건에서 가장 오래 남은 쟁점이다. 법무부 실무 라인이 포기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는 사실은 1993년 조사위원회가 확인했으나, 그 의견이 어느 선에서 뒤집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사위원회는 관련 문서 일체가 1991년 이전에 폐기되었다고 보고했다.

6. 군사법원 재판 [편집]

재판은 모르방 기지 내 루이나 공군 제4전술비행단 군사법원에서 열렸다. 9월 14일 첫 공판이 시작되었고, 전 과정이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유고랜드 측 방청은 허용되지 않았고, 유고랜드 정부가 요청한 검사 참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증인으로 두 차례 출석했다. 출석은 모두 기지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통역은 루이나 측이 지정했다. 피해자 측이 요청한 유고랜드 변호사의 동석은 '군사법원 절차에 근거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11월 20일 선고가 있었다.
이름
계급
나이
선고
올리비에 T. 뒤메닐
상병
21세
징역 4년
드니 M. 파주
상병
22세
징역 2년
파스칼 J. 르그랑
일병
20세
무죄

르그랑에 대한 무죄 사유는 차량 운전 외의 관여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뒤메닐과 파주에 대해서는 복무 중인 점, 초범인 점, 피해 회복을 위한 성의를 표한 점이 양형에 참작되었다.

판결문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유고랜드 정부에 전달된 것은 3쪽 분량의 결과 요지였고, 피해자에게 전달된 것도 같은 문서였다. 루이나 국방부는 1993년과 2001년 두 차례 전문 공개를 거부했으며, 사유는 '군사법원 기록의 관리 규정'이었다.

7. 반응 [편집]

7.1. 유고랜드 [편집]

사건은 6월 초 지역 신문 보도로 알려졌다. 6월 18일 재판권 포기가 발표되면서 항의가 전국으로 번졌다.

7월 11일 하다드지구 중앙로에서 1만 2,000여 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였고,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해산했다. 이날 연행자는 240여 명이었다. 7월과 8월 사이 나크시에 로스탐부와 시디벨아베스에서 열린 관련 집회는 60여 건, 누적 참가 인원은 7만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정부의 대응은 일관되게 통제였다. 7월 15일 내무부가 관련 집회의 사전 허가를 일괄 불허했고, 8월에는 사건을 1면에 실은 지역 신문 2종이 등록 취소 처분을 받았다.

이 통제가 사건의 성격을 바꾸었다. 항의는 처음에는 가해자 처벌과 재판권을 요구했으나, 가을을 지나면서 집회·언론 규제 자체를 겨냥하는 쪽으로 옮겨 갔다. 또한 남부에서 시작된 항의가 북부로 번지면서, 아랍어권과 한국어권이 같은 사안을 두고 함께 움직인 독립 이후 첫 사례가 되었다. 유고랜드 현대사 서술에서 1987년 여름은 시민사회 형성의 기점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진다.

다만 이 시위가 체제를 바꾸지는 못했다. 집회·시위 사전 허가제와 신문 등록제는 이후로도 유지되었고, 유고랜드의 정치 체제는 현재까지 비자유민주주의로 분류된다.

7.2. 루이나 [편집]

루이나 국내에서 사건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사건 발생부터 선고까지 6개월간 전국 일간지의 관련 기사는 모두 11건이었고, 그중 9건이 《라 부아》와 《코망테르》의 것이었다.

《라 부아》는 1987년 8월 기획 기사에서 유고랜드 주둔 병력의 형사사건 처리 통계를 처음으로 정리해 보도하면서, 협정 발효 이후 2년 동안 루이나가 제기한 재판권 포기 요청이 한 건도 거부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기사는 당시 루이나 국내에서 큰 반향을 얻지 못했으나, 1996년 진양지구 사건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연합은 사건에 대해 공식 논평을 내지 않았다. 국방부는 8월에 '해외 주둔 부대 기강 확립 대책'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외출 시간 단축과 영외 음주 지도에 관한 것이었다.

8. 그 후 [편집]

8.1. 세 사람 [편집]

올리비에 T. 뒤메닐은 루이나 본국의 군 교도소로 이송되어 복역하다 1990년 3월 9일 가석방되었다. 실제 복역 기간은 미결 구금을 포함해 2년 9개월이었다. 파주는 1989년 만기 출소했다. 두 사람 모두 불명예 제대로 처리되었다.

파스칼 J. 르그랑은 무죄 판결 뒤 원대 복귀했다가 1988년 만기 전역했다. 유고랜드 측은 1993년과 1997년 두 차례 르그랑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했으나 모두 거부되었다.[2]

8.2. 피해자 [편집]

피해자는 1987년 9월 공장을 퇴직했다. 1988년 하다드지구를 떠났고, 1990년 이후로는 유고랜드에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나 측이 지급한 배상금은 없다. 지위협정 제23조는 공무집행 중이 아닌 행위로 인한 손해에 대해 루이나가 위로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만 규정했고, 이 사건에서 루이나는 지급하지 않았다. 유고랜드 정부가 1988년 국내 예산으로 지급한 지원금은 4,200달러였다.

피해자는 2004년 5월 30일 사건 17주기에 유고랜드 주간지와 익명 서면 인터뷰를 했다. 이것이 공개된 유일한 피해자 진술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재판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를 말하러 간 자리에서, 내가 아는 말을 쓰는 사람은 통역뿐이었다"고 적었다.

8.3. 협정 개정 요구의 좌절 [편집]

1988년 4월 12일 유고랜드는 지위협정 개정 협의를 공식 제안했다. 요구는 중대범죄에 대한 재판권 포기 요청 제도의 폐지와 기소 시점 신병 인도 두 가지였다.

루이나는 같은 해 7월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루이나 국내 정치가 급격히 요동치면서 협의는 재개되지 못했다. 1988년 6월 민주연합이 해산했고, 이듬해에는 헌정 위기가 일어났다. 1991년 1차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다룬 것은 관세·노무 조항이었고, 형사재판권 조항은 그대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1988년에 제기된 두 가지 요구는 13년이 지난 2001년 협정 2차 개정에서야 관철되었고, 그 계기는 이 사건이 아니라 1996년의 루이나군 진양통 부부 살인사건이었다.

8.4. 유고랜드 측 태도의 변화 [편집]

사건 이후 유고랜드의 실무 관행은 바뀌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유고랜드는 살인 사건 3건과 성폭력 사건 11건에서 재판권 포기 요청을 거부했다. 협정 발효 후 첫 2년간 거부 사례가 한 건도 없었던 것과 대비된다.

1996년 진양지구 사건에서 유고랜드 법무부가 포기 요청을 거부하며 낸 발표문에는 "1987년의 선례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정부 문서가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한 첫 사례였다.

8.5. 재조명 [편집]

1992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면서 사건이 다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93년 10월 19일 민의원 주둔군범죄특별조사위원회가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재판권 포기 결정 과정의 문서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 증거물 처리 경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 판결문 전문을 입수하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조사위원회는 2차 보고서를 내지 못하고 1994년 활동을 종료했다. 종료 사유는 자료 제출 거부였다.

9. 여담 [편집]

  • 이 사건은 유고랜드가 중대범죄에서 재판권을 포기한 마지막 사례다.
  • 모르방 기지는 2009년 반환되었다. 기지 부지는 현재 나크시에 로스탐부 물류단지로 쓰이고 있다.
  • 사건 현장 인근 수로변에는 1997년 주민들이 세운 표석이 있다.
  • 2011년 민의원은 사건 당시 연행된 240여 명에 대한 명예회복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에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이 점이 채택 직후 비판받았다.
  • 루이나 국방부는 2001년 협정 개정 당시에도 이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다. 2016년 발몽 기지 폐쇄 행사에서 나온 주유고랜드 루이나군 사령관의 발언이 사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공식 발화로 거론되나, 사건명은 쓰이지 않았다.

10. 관련 문서 [편집]

[1] 유고랜드의 유엔 가입은 1990년 4월 7일이다.[2] 유고랜드 측은 르그랑이 유고랜드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루이나는 지위협정 제22조 제8항의 이중처벌 금지 조항을 들어 거부했다.